광교노인복지관 역사문화탐방반은 지난 19일(수) 전통과 근대가 만난 덕수궁과 환구단, 중명전, 러시아공사관을 집중 탐방했다.

역사문화탐방반 수강생 10명은 강사 김희태 선생님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나 서울광장을 지나 환구단으로 갔다. 시청앞 광장은 많은 사람들로 할기찬 도심의 에너지가 넘쳐났다.

▲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대한 제국 시대의 제단으로 사적 제157호이다.

환구단은 1897년(광무 원년) 대한 제국 시대의 제단으로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황제가 유교의 예법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은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 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 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황궁(현재의 덕수궁)과 마주보는 자리에 지어졌다.

환구단 터에는 황궁우 건물이 있는데 환구단을 쌓은지 2년 뒤인 1899년에 완공되었다. 황궁우 옆에는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3개의 석고가 있다. 이 석고단은 돌로 만든 북의단으로 1901년 12월에 민관 유지들이 고종의 성덕을 찬양하는 석기문비를 세우기로 결의하여 이듬해에 준공한 것이다.

현재 환구단 대부분의 터에는 조선호텔이 들어서 있다. 처음으로 방문한 환구단에서 사진을 찍으며 의미 있는 역사문화를 체험했다.

▲ 환구단 터에는 황궁우 건물과 3개의 석고가 있다.

탐방반 일행은 서울광장을 가로질러 추억이 깃든 덕수궁(德壽宮) 돌담길을 걸었다. 돌담을 끼고 나 있는 정동길에는 차없는 곳으로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역사유적과 함께하는 정동에는 서울시립 미술관과 고풍스러운 정동교회가 있었고 대사관들과 근대 건축물을 만날 수 있었다. 정동극장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니 '중명전'이 나왔다.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 일본의 강압 속에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중명전은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황실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황제의 서재로 지어졌다. 1904년 덕수궁에 큰불이 일어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편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 속에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주권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였고 각계에서 조약 체결 반대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 고종의 인장인 황제어새

그러나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친일내각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잠식하는 여러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행정, 사법, 군사권을 장악당한 대한제국은 결국 1910년 일본에 병합되었다.

비운의 역사 현장 중명전에서 열강의 제국주의 논리 아래 사라져갔던 대한제국의 최후를 살펴봤다.

현재 중명전은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여, 보다 생생히 당시의 상황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관은 ‘덕수궁과 중명전’, ‘을사늑약의 현장’,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 ‘대한제국의 특사들’로 총 4개의 전시실이 있다.

▲ 제1 전시실인 ‘덕수궁과 중명전’

‘덕수궁과 중명전’ 전시실에서는 중명전이 설립되는 과정과 정동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상황이 재현된 ‘을사늑약의 현장’에서는 그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피부로 느껴볼 수 있다.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과 ‘대한제국의 특사들’ 전시실에서는 을사늑약 체결 이후, 주권을 되찾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숨결을 느끼며 이화여고 앞길로 조금 더 오르니 언덕에 구러시아공사관이 있었다. 서울시 중구 정동 15–1번지에 있는 구러시아공사관은 러시아인인 세레진 사바틴(Seredin-Sabatin)이 설계한 르네상스 양식의 조선 말기 건축물이다.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1885년(고종 22)에 착공하여 고종 27년인 1890년 준공되었다. 이곳은 고종이 1896년부터 그 다음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피신했던 아관파천의 역사적 현장이다.

▲ 구러시아공사관

19세기 후반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갑오년(1894)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고 그 다음해인 을미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바로 그 다음해 병신년인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비밀리에 궁궐을 탈출하여 타국의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는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에 옮겨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 뒤 친러ㆍ친미파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내각은 곧바로 민심 수습을 위한 조칙을 발표했다. '상투를 장려하지도 않지만 단발령에 대해서도 가부간 언급을 피해 민심을 자극하지 않는다. 의병항쟁의 책임은 불문에 부치며 병력은 조속하게 소환한다.' 이 사태가 바로 친러 세력과 러시아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현재 정동에 있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아관파천이다.

고종이 러시아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을 한 날은 1897년 2월 20일, 궁궐을 떠난 지 만으로 일 년째 되는 날이었다. 환궁 후에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아관파천의 현장인 러시아 공사관은 현재 사적 제253호로 지정되어 있다.

▲ 덕수궁, 대한문 수문장

정동길을 되돌아 나와 덕수궁으로 들어갔다. 덕수궁 대한문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대한문을 들어서니 왼쪽편에 하마비가 있었다. 내용은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로 '높은사람 낮은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말에서 내려라'란 뜻이다.

원래 하마비는 궁궐의 문 밖에 있어야 되는데 아마도 어디에선가 가지고 온 것일 것이다. 바로 앞에는 금천교(禁川橋)가 있는데 다리를 건너는 관인들이 청렴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 大小人員皆下馬비

덕수궁(德壽宮)은 조선 14대 왕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후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을 임시 궁궐로 삼으면서 처음 궁궐로 사용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또한 대한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경운궁에 여러 전각들을 세우고 궁궐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당시에 궁궐은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규모의 3배 가까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강압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고종은 1919년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빠르게 해체·축소되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서양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개항 이후 고종이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고 근대 개혁을 추진하면서 덕수궁 안에는 여러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이 중에서 석조전, 중명전, 정관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 정관헌에서 처음으로 고종이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정관헌(靜觀軒)은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운 휴식용 건물이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줄지어서 내부 공간을 감쌌고, 동안서 세 방향에 베란다를 마련했다. 베란다의 기둥은 목조이며 기둥 상부에 청룡, 황룡, 박쥐, 꽃병 등 한국의 전통 문양을 새겼다. 이 한양(韓洋)절충의 이국적 건물 안에서 고종은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 한다.

▲ 일제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제위를 양위한 고종이 퇴위 후 승하하기 전까지 머물던 고종의 침전

함녕전(咸寧殿)은 보물 제820호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제위를 양위한 고종이 퇴위 후 승하하기 전까지 머물던 고종의 침전이었다. 1897년 창건되어 1904년에 중창된 겹처마 팔작지붕의 정면 9칸 측면 4칸 집으로, 서쪽 뒤편으로 4칸이 꺾여 있는 ㄴ자형 건물이다.

함녕전은 1904년 덕수궁 대화재의 진원지였다. 당시 화재는 며칠째 수리하느라 젖은 구들을 말리려고 지핀 불이 과하여 나무기둥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일어났고, 때마침 불어온 북동풍으로 삽시간에 궁궐 전체로 번졌다고 한다.

하지만 온돌의 구조상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없어 이때의 화재는 일제에 의한 의도적인 방화가 아니었겠나 하는 의심을 줄곧 받아왔다. 함녕전은 그때의 화재에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이곳에 잠시 머물다 창덕궁으로 이어했으며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에 머물던 고종이 거처를 이곳으로 옮겨와 말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에 승하했다.

▲ 중화전에는 임금이 앉는 어좌가 있다.

중화전과 중화문은 보물 제819호이다. 중화전은 네 벽면 전체가 문과 창으로 구성되어 막힌 벽이 없고, 내부는 전체가 한 공간으로 트여 있으며, 바닥에는 무늬가 없는 방전(方塼)을 깔았다. 내부 북쪽에는 중화전 임금이 앉는 어좌가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 병풍이 설치돼 있다.  

이 일월오악병은 1897년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어 중화전 건립에 맞추어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위를 올려다보면 소란반자에 단청을 올린 천장이 무척 화려하다. 그 화려한 천장 가운데 틀을 위로 올라가게 만들어 구름 속에 노니는 쌍룡을 조각해 넣었는데 그 모습이 대한제국이 '황제의 나라'임을 나타내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 석조전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서양식 석조 건물이다.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서양식 석조 건물로, 영국의 건축가 하딩(J.R. Harding)DL 설계하여 1910년에 완공하였다.

조선 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궁궐 건물이다.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중앙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건물의 전면과 동서 양면에 배란다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했고, 1938년에 서관을 증축하면서 그 앞에 서양식 분수정원도 조성했다. 서관(西館)은 의석조(疑石趙)로 지은 몸체 중앙에 코린트식 기둥의 현관을 덧붙인 모습이다.

석조전은 190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에 완성되었다. 석조전은 접견실과 대식당 등 공적인 공간과 침실과 서재 등 황실 가족의 생활공간이 갖추어진 대한제국의 대표적 서양식 건물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이래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내부의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의를 회복하기 위해 2009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 덕수궁,

석조전 앞 분수대를 포함한 연못은 영국인 브라운이 발의, 하딩이 설계해 1910년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식 정원이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돌아본 일행은 덕수궁 돌담길 초입에 있는 무교동 낙지집에서 매콤한 낙지덮밥과 막걸리 한잔씩 마시며 씁쓸한 미소를 띄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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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취재: 김영기 부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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