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노인복지관 역사탐방반 일행 8명은 20일(수) 오후 1시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으로 역사탐방길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매송면사무소 앞 우물, 우성전 묘, 우하영 묘, 수성최씨 시조 묘, 매곡서원지 등을 다녀왔다.

▲ 어천 1리 큰 우물이 있는 어천정

먼저 매송면사무소에 주차를 하고 어천1리에 있는 큰 우물인 어천정을 둘러봤다. 이 우물은 지하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우물이라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화합의 장인 큰 우물을 복원하고, 고풍스런 기와 처마와 도자기로 만든 물고기 모형의 솟대를 만들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차로 이동해 매송면 숙곡리 산 71-1번지에 있는 우하영 묘로 갔다.

▲ 조선 후기 대표적인 농촌 지식인이자 실학자인 우하영의 묘

조선 후기 대표적인 농촌 지식인이자 실학자인 우하영의 묘는 2003년 4월 21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우하영은 우성전의 7대손으로 본관은 단양, 자는 대유, 호는 취석실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서 수원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중양 정계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전국의 산천을 체험한 후 옛 문헌과 당대 여러 학자들의 논설을 널리 수집하고 연구해 국가와 사회의 경영 및 개혁 방안을 종합한 『천일록(千一錄)』을 저술했다.

시골의 유생으로 우하영이 평생 추구한 사상의 핵심은 재야 농촌 지식인의 체험적 농업론을 바탕으로 한 권농 정책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전제·군제·국방·관제·농업 기술문제 등에 관한 그의 독창적인 사상과 정책을 기술한 것이다.

1796년(정조 20년) 조정의 구언교서(求言敎書)가 내리자 그는 이를 간추려 정리하여 책자로 만들어 바쳤고, 1804년(순조 4년)의 구언 때 이를 다시 보완하여 『천일록』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서인지, 비석도 세워지지 않은 우하영의 묘가 몹시 쓸쓸해 보였다.

▲ 숙곡리 산 81-1번지에 있는 향토유적 제17호인 수성최씨의 시조 최영규의 묘

수성 최씨 시조 묘는 새로 세워진 신도비가 입구에 있었다. 그곳에 차를 세워놓고, 숙곡리 산 81-1번지에 있는 향토유적 제17호인 수성최씨의 시조 최영규의 묘로 갔다.

▲ 수성 최씨와 부인 정경부인 이천 서씨와 합장묘

7분 정도 야산 중턱으로 올라가 보니 시야가 훤하고 묘역이 무척이나 넓었다.

부인 정경부인 이천 서씨와 합장묘로 원형의 봉분 뒤편을 높다란 사성이 둘러싸고 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 좌측에 세워진 묘비는 비신의 재질이 흑요암이고 비신 위에 옥개석을 갖추었다. 봉분 주변으로 장명등, 문인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좌우 끝에는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수성이란 옛 수원의 지명이기 때문에 수성(수원도 함께 표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성 최 씨의 시조는 최영규로 본래 그는 신라 김 씨의 후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13세손이었기에 본래 성씨는 김 씨였지만, 고려 충렬왕에 의해 최 씨 성을 사성을 받고, 수성백에 봉해진 것이 수성 최 씨의 시작이 되었다.

▲ 새로 세워진 우성전의 신도비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성전의 신도비가 있었다. 남인계 후배인 실학자 성호 이익이 비문을 짓고, 이상천이 전액을 한 신도비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자 의병장 우성전의 묘는 숙곡리 산 79-1번지에 있다. 우하영의 묘와는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 우성전 묘역의 봉분은 쌍분으로 부인 양천허씨 와의 합장묘이다.

추연 우성전 묘역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우성전의 묘역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우하영과 2003년 4월 21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우성전은 본관은 단양, 자는 경선, 호는 추연으로 퇴계 이황의 문인 중 가장 으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우성전은 156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 1년 문과에 급제한 후 검열, 수찬 등을 거쳐 선조 9년 수원 현감이 되었다. 당시 수원에 온갖 폐단들이 많았는데 우성전이 어진 정사를 펼쳐 바로 잡자 고을 사람들이 커다란 비를 세워 그 공을 기렸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원 지방을 중심으로 2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추의군’이라 하고 화성, 강화, 용산, 의령 등지에서 소금과 식량을 조달해 난민을 구제했으며, 나주에서 올라온 김천일 부대와 함께 강화로 들어가 공적을 세웠다.

그 공로로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후 물러나는 왜군을 경상도 의령까지 추격하다가 돌아오던 도중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이다. 우성전의 묘역 아래로는 단양 우씨 후손의 묘소들이 펼쳐져 있다.

우성전 묘역의 봉분은 쌍분으로 부인 양천허씨 와의 합장묘이다. 묘역의 석물로는 묘비 1기, 상석·향로석 각 1기, 망주석 2기가 있고, 묘역에 이르는 도로 입구에 신도비 1기가 있다.

▲ 매곡서원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노론의 우두머리인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던 서원이었ek.

마지막으로 차를 타고 매송면 천천리 179번지에 있는 매곡서원을 찾아 들어갔다.

매곡서원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노론의 우두머리인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던 서원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다. 현재 매곡서원자리는 폐허가 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고 주춧돌 10개가 남아 있다. 주춧돌이 4개씩 3열로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당 자리인 것으로 추정된다.

송동면은 원래 광주부에 속했는데, 정조 때 수원으로 편입되었다. 숙곡리는 깊은 골짜기 내에 있는 마을이다. 골이 깊고 삼림이 울창하여 숙연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라 하여 숙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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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취재: 김봉집 단장, 김영기 부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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