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I수원시정연구원

11월7일 목요일 오후 2시~6시까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제6회 수원학 심포지엄 '참담하고 노여웠던 우리들의 시대'가 열렸다.

▲ 위둰들의 기념 촬영

최병대 수원시정연구원장은 개회사에서 "금년 한 해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세기가 지나간다. 주제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참담하고 노여웠던 우리들의 시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시간이다. 핵심적인 주제는 근대 일제 강점기에 협력의 길에 선 수원 지역의 시대의식과 고민을 추적하고 이에 대한 합리적인 수준과 후대에 역사적 평가를 통해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진정한 가치를 재조명하는 그런 날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변기재님의 아들 변순용 부부

오늘 참석자는 최병대 수원시정연구원장, 박환 3·1운동추진위 공동위원장, 오성덕, 김봉집부위원장과 오산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변기재님의 아들 변순용(변기재의 3남 1녀 중 3남)선생 부부 등 관심 있는 시민들이 참석해서 발표와 토론을 지켜보았다. 변기재님은 "부친이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했다. 해방무렵에 시대적 상황과 함께 활동하던 선배,동지들의 공산주의-사회주의 이념을 따라 월북을 한 것 같다."고 밝히며 후손으로서 연좌제 등으로 힘들었던 시간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고 하였다.

▲ 이승렬(역사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의 발표

▲ '3·1 운동과 수원 로컬리티'라는 주제로 이승렬 역사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의 발표가 있었다.

이승렬 선임연구원은 수원의 3·1운동을 거론할 때 거론되는 몇 가지 요소로 첫째로 수원지역이 3·1운동 초기부터 시작해서 4월 중순까지 만세시위가 꾸준하게 이어졌다. 둘째는 그 선상에서 제암리 및 수촌리 일대에서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셋째는 3·1운동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48인'중의 한 명인 김세환에 관한 것이다.

열린 포교(布敎)의 문 1884년 6월 24일 서울에 도착한 선교사 맥클레이는 교섭 통상사무아문 협판 김옥균을 경유하여 고종으로부터 선교사업 허가를 받았다. 고종은 "학교와 병원 설립"이란 단서를 달았지만 실질적으로 기독교 포교를 허용한 것이다.

김노적의 뒤를 이어 김세환이 수원지회장이 되고 1930년 4월 25일 임시대회에서 검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지역사회에서 김세환의 명망이 유지되고 1939년에 삼일학교를 살리기 위해 수원갑부 최상희로부터 2만원의 기부금을 받아낸다. 1941년에 홍사문과 함께 화성학원을 수원상업학교로 전환하는데 관여했다.

3·1운동의 시위 과정에서 나타난 '우발적 폭력'의 '급진성'을 너무 강조해도 안되고, 진압 과정에서 나타난 '계획적 기획 폭력'의 '잔인성'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수원의 로컬리티의 미시적 요소들은 민족 혹은 국가라는 단위의 역사 담론에 내재되어 있는 도식적인 이항대립을 넘어서서 화해와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풍부한 이야기들의 원천인 것이다. 로컬리티는 단순하게 '중심'에 대해 '주변'의 저항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을 통해 역사의 진전을 위한 토대인 것이다.

▲ 이혜영(화성시청 학예사)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홍면옥의 독립운동과 생애'에 대한 주제로 이혜영 화성시청 학예사의 발표가 있었다.

일본인 순사가 시위대에 의해 타살되었다. 왜 이들 지역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이 격발되었을까. 그 주요한 원인은 경제적 수탈이었다. 염전, 농토에 대한 수탈이 격렬한 만세운동의 원인이었다. 3·1운동 관련 자료, 증언자료 등을 바탕으로 송산지역 3·1운동,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홍면옥과 송산지역의 네트워크를 살펴보고 출옥 이후 홍면옥의 활동과 해방공간에서의 홍면옥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 거칠게나마 언급한다.

송산지역 3·1운동 내용과 홍면옥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신문조서, 판결문, 일제 감시 대상 카드, 형사 공소 사건부 등이 있다. 1919년 3월 26일, 구장 홍면선의 집에서 호세를 납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향해 홍효선이 다른 지역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우리도 부르자는 제안에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오후 2시경 면사무소 뒷산에서 오후 4시경에는 주민 100~200명이 송산면 사무소로 몰려가 구한국국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저녁에 서신면 방면으로 행진해 밤 11시경에 해산했다. 1919년 3월 28일 사강 장날 1천여 명의 군중들이 송산면 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서 구한국국기를 앞세우고 조선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3월 28일 5시경 홍면옥, 홍준옥, 김명제가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홍면옥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고 27년 2월 감형 받아 27년 12월 23일 출옥한다. 대교 서당을 운영하면서 서당은 홍면옥이 학생들에게 자신의 항일정신을 투영해 내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송산면의 만세운동은 '비폭력적 평화주의'라는 3·1운동 대의 명제에 균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송산면의 만세운동은 오랜 세월 집적된 지역적 혈연적 관계망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3.28 홍면옥의 총격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처음에는 홍면옥과 몇몇 마을의 지식인들이 추동하고 송산면 민들의 강고한 유대감과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전개되었다.

▲ 발표자들(좌)과 좌장 박철하, 토론자들(우)

△이동근(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의 토론문

송산면 3·1운동에 대한 부분에서 수탈=저항. 피해=저항이라는 분석 방식을 넘어 남양 홍씨 집성촌에 대한 전통적 사회질서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명확하게 3·1운동을 하게 된 이유가 설명되지 않고 순사 처단의 이유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가족을 등지고 홍면옥의 마지막으로 선택한 월북행이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 같다.

▲ 김영숙(동아대 연구교수)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5분간의 휴식 후 다시 3시 20분부터 시작되었다.

▲ '일본 제국주의의 3·1운동 탄압과 제암리 고주리 사건'이라는 주제로 김영숙 동아대 연구교수의 발표가 있었다.

김영숙 연구교수는 이 사건에서 첫째 일본군의 군대증파의 원인 과 그 내용, 둘째 제암리 사건의 경위와 외부로 알려지는 과정, 셋째 일본제국주의의 제암리 사건 책임자 은폐내용에 대해 분석한다.

조선파견 보병대대는 4월 10일을 전후하여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때 일어난 사건중의 하나가 제암리 고주리 사건이다.

1919년 4월 15일 수원 제암리에서 발생한 일본군이 잔혹한 학살은 3·1운동 진압 중에 일어난 유일한 참상이 아니다. 단지 외국인 선교사와 외교관들에 의해 현장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외 언론에까지 소개되어 일본제국주의 3·1운동 탄압의 상징적인 사례가 된 것이다. 조선군 사령관과 조선 총독은 사건이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알려지자 육군과 척식 국장관, 수상에게 보고하는 한편 사건 은폐 및 축소를 꾀하였다. 조선총독부에 관련해서 일본이 한 명도 처벌하지 않고 끝나는 것이 아쉽다. 제암리 사건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3·1운동 탄압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한국인에 의한 구술조사와 정확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오늘날에도 한국 학계의 과제로 남아있다.

△유지아(원광대학교)의 토론문

10년에 한번 꼴로 승리한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성장한 군부나 정치권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 구군부와 정치권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선교사의 움직임이 있었는가 물었는데 선교사 400명 정도이다. 그들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뒤에는 국가가 있고 외교관하고도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4월에 선교사 한 명이 범인 은닉죄로 체포되었다.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일본이 국제 사회적으로 어떻게 지위가 변하는가 하는 것을 말하면 1차 대전 이후에는 전승국이고 세계대전에는 패전국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3·1운동으로 사회적 비판을 받았지만 베르사이유 체재라고 불리는 국제관계에서는 상승세를 타고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1921년 워싱턴 회의를 통한 체제로 갔다. 중국이 강화조약에 조약하지 않았는데 워싱턴을 통해서 조약이 되고 워싱턴 체제를 통해서 1920년대 협조의 도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 한동민(수원화성박물관장)의 발표

▲ '일제강점기 저항적 지식인 박승극'이라는 주제로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의 발표가 있었다.

박승극은 1920년대부터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운동가였다. 수원지역에서 1920년대 말까지 김세환의 시대였다면 1928년 검속 이후 박승극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뜨거운 '울트라(ultra)'였다.

1930년은 격동과 파란의 한 해였다. 당시 박승극은 수원청년동맹 집행위원이자, 조선 총동맹 중앙위원이었다. 박승극의 역할만큼 일제의 탄압 또한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1932년 11월 수진 농조 사건으로 구속된 박승극을 비롯 김영상, 장주문, 이원섭 등은 1933년 무죄 석방되었다. 경찰이 공모하여 날조한 것이 밝혀져 1년 6개월 만의 일이다.

박승극은 1928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담 1929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소설 '농민'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박승극은 1933붓대를 꺾고 싶을 정도라는 심정을 토로하지만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이러한 지속적 글쓰기를 통해 중앙문단 논쟁의 중심으로 들어가 있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쓰자!'는 슬로건으로 붓을 든 혁명가를 꿈꾸었지만 현실을 녹녹치 않았다. 박승극은 고향 정문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농민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쓰면서 해방의 그날을 위해 일제강점기를 버티고 있었다.

오늘의 심포지엄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했지만 아직도 찾고 밝혀야 할 사항들이 많음을 깨닫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동취재: 김봉집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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