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곡서원 앞 홍살문

5월 28일(목) 이른 점심을 먹고 오후 1시에 햇볕도 보고 운동도 할 겸 가까운 서원을 찾았다. 조선시대 젊은 충신이었던 조광조 선생의 제사를 지내기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코로나로 한산할 줄 알았는데 단체관광버스가 서 있었다.

얼른 자리를 피해 건너 맞은편에 위치한 조광조 선생의 묘역을 보러 갔다. 먼 발치에서 보기에도 시원하고 깨끗하게 잘 정돈된 묘역이었다. 잔디를 밟으며 올라가니 제법 가파르고 잘못 발을 디디면 미끄러질 것도 같아 조심조심해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제법 등산을 한 것 같은 운동효과를 본 기분이 들었다.

▲ 심곡서원 전경

오는 길에는 얼마 전 새로 건물을 짓고 영업을 시작한 빵집에 들러보니, 1층부터 3층까지 빵과 커피를 즐기려는 손님들로 붐볐다. 1층은 빵, 2층은 커피, 3층은 테라스가 있는 휴식공간이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소비가 위축되었다는데, 혹시나 운영에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강당

단체 손님이 떠난 심곡서원은 조용했다. 500년 된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는 두 사람, 400년 된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는 3사람이 나른한 오후의 평온함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해가 든 빈 의자에 자리를 잡고 잠시 쉬었다.

▲ 수령 500년된 느티나무

그런데 햇살은 따뜻하고 생각보다 넓은 잔디밭에 앉아서 푸르름을 즐기다 보니 마음도 편안했다. 처음에는 옛 서원 안에 현대식 벤치가 있어서 조금 어색했는데 꽤 넓은 서원을 둘러보니, 작은 휴식처가 따로 마련되어 잠시 앉아서 몸도 쉴 수 있고, 바삐 움직이던 생각도 쉴 수 있어서 고마웠다. 연일 계속되는 코로나19의 불안감에 집안에만 머무르지 말고, 이렇게 야외 공간에 자주 들러 시원한 공기도 마시고 넓은 시야로 하늘을 봐야지 다짐을 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 관광버스

심곡서원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 (상현동)에 위치해있고 사적 제530호다. 조선 중기 중종대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1482~ 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 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활약하면서 급진적인 사회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1) 로 사약을 받았다.

심곡서원은 효종 원년 1650년에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설립했고, 효종은 ‘심곡’이라는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 교육을 담당하였다.

심곡서원 입구의 홍살문과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사당)가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고 유림들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강당 안에는 숙종의 어제어필이 담긴 현판과 서원의 규약등이 걸려 있다.

사당에는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문신, 조광조를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하였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심곡서원은 최초 사당을 중심으로 제향 기능을 강조하여 지었으며, 이후 앞쪽에 강당을 두고 뒤편에 재사를 두는 전당 후재의 모습을 보였고, 심곡서원도가 그려진 시기에 앞서서 전재 후당의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음은 옛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조광조 선생의 묘소는 심곡서원 맞은편 좌측 앞산에 있으며, 심곡서원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7호에서 2015년 국가 사적 제530호로 지정되었다.

1) 기묘사화: 1519년에 조광조와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사건

위의 글은 심곡서원입구 안내판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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